저무는 가을의 끝자락을 풍성하게 채워 줄 영화들이 찾아온다. 스페인 최고의 거장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31년 만의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영화라는 장르만이 줄 수 있는 온전한 감동과 몰입을 선사한다. 인물 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린 치카우라 케이 감독의 신작 ‘위대한 부재’가 공개되며, 사회가 규정한 역할을 넘어 진짜 나 자신을 찾는 주인공의 여정을 담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도 재개봉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노년의 영화 감독이자 작가인 ‘미겔’은 한 TV 탐사 프로그램으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는다. 22년 전 실종된 배우 ‘훌리오 아레나스’에 대해 증언해 달라는 것. 그의 절친이자 승승장구하던 배우였던 훌리오. 미완성작 ‘작별의 눈빛’ 촬영 중 홀연히 사라진 그에 대해 세상은 사고인가, 자살인가, 음모인가 온갖 추측을 내놓는다. 그렇게 시작된 사라진 친구를 찾는 여정. 방송사에서 제시한 높은 금액의 사례금에 덜컥 옛 친구를 찾는 일을 수락했지만, 기억 저편에 묻고 있었던 친구의 흔적들이 되살아날수록 겨우 잊고 지내던 삶의 비극들이 다시 떠오른다. 망쳐버린 영화와 빛 바랜 꿈,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에 묻은 자식과 아내까지. 미겔은 훌리오의 흔적을 찾으며 잊고 지내던 자신의 지난한 과거와 조우한다. 어느덧 칠십대에 접어든 주인공의 뒷모습을 따라 영화는 삶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 본다. 12세 관람가. 169분.
■위대한 부재=“처음으로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도쿄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타카시’는 어린 시절 자신과 어머니에게 큰 상처를 준 아버지 토야마를 미워하며 연락을 끊고 지낸다. 어느 날, 아버지가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그가 있는 규슈로 내려가지만 다시 만난 아버지는 치매 증상으로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의 실종 소식. 자취를 감춘 새어머니는 스스로 사라진 걸까? 아니면 아버지에 의해 사라진 걸까?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메모들을 따라 아버지의 지난 삶의 흔적을 찾아내고자 한다. ‘치매’라는 소재로 풀어내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인질극은 애정과 애증으로 얽힌 가족의 민낯을 서서히 비춘다. 인질 없는 인질극을 벌인 아버지와 가족이라는 이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아들. 그들의 여정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15세 관람가. 134분.
■톰보이=새로 이사 온 아이 ‘미카엘’. 파란색을 좋아하고, 끝내주는 축구 실력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 짧은 머리로 친구들을 사로잡는 아이의 진짜 이름은 ‘로레’라고 한다.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종잡을 수 없는 미카엘의 외형과 행동. 생물학적 성별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초교 입학을 통해 로레는 더 이상 미카엘로 존재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다. 결국 성별이 밝혀지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만 미카엘. 세상은 그를 그저 머리 짧은 여자아이,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남자가 되고 싶은 그저 특이한 여자아이로 칭하지만,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는 진짜 나를 찾고자 하는 강렬하고도 복잡한 욕구가 날로 뒤엉켜 간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 짓는 사회 속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일까? 로레의, 미카엘의 나를 찾는 여정을 따라 눈물겹게 아름답고, 눈부시게 다정했던 10살 여름의 비밀 이야기가 시작된다. 12세 관람가. 8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