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아노라>(*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이름을 날린 션 베이커 감독의 신작 <아노라>가 국내 개봉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본작은 스트리퍼 '아노라'가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러시아 부호와 결혼하게 됐다가 더 큰 가정사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영화로, 2022년 영화 <스크림>으로 본격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 미키 매디슨이 주연을 맡았다.
가볍고 재미있는 코미디적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우리 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 베이커 감독 특유의 기법은 <아노라>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이번에는 소재가 감독의 역량을 압도해 버린 듯한 면모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게 최선이었나 ▲ 영화 <아노라> 스틸컷ⓒ 유니버설픽처스
<아노라>는 스트립 클럽 '헤드쿼터스'에서 일하는 여성 '아노라'가 러시아 부호의 아들 '이반'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영어에 약한 이반은 미국 땅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아노라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를 스트립 클럽 밖에서도 사적으로 고용하는 등의 행보를 이어간다.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돌아가기 싫었던 이반은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아노라와 갑작스러운 결혼을 결정한다.
하지만 막상 이반의 부모님이 결혼 무효화를 주장하며 미국에 도착하자 이반은 겁에 질려 내뺀다. 아노라는 이반 부모님 휘하의 사람들과 함께 자기 남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아노라는 몇 번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창녀'라며 비난받는다. 아노라를 이용해 결혼까지 주도적으로 몰아붙인 건 이반이었는데 말이다.
고생 끝에 자신이 일하던 클럽에서 술에 취한 이반을 찾아낸 아노라는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결혼 취소를 막으려고 이반을 설득하려던 작전은 수포가 되고, 이혼 소송을 통해 위자료라도 얻어 내려던 계획 없이 승산이 없게 됐다. 결정적으로 이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영화는 아노라가 지친 상태로 이반 부모님이 고용한 '이고르'와 대화를 나누면서 끝맺는다. 이고르는 작중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아노라를 향한 욕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아노라의 스트리퍼 이름 '애니' 대신 그의 본명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노라는 이고르의 이러한 다정함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신체적 유혹을 감행해 보지만, 이마저도 이고르는 거절한다.
<아노라>의 주제 의식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아노라를 탐하지 않는 이고르가 '착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도의적인 인간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 그가 특별히 아노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고르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아노라를 하찮게 여기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이 '정상적인' 남성 캐릭터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전형적인 캣파이트(catfight, 여성 간의 싸움을 일컫는 표현으로, 주로 하찮고 관음적으로 묘사된다 - 기자 말)신을 운용한 점 등은 아쉬운 요소로 남는다.
구조적 문제는? ▲ 영화 <아노라> 스틸컷ⓒ 유니버설픽처스
물론, 위에 기술한 단점 역시 션 베이커 감독의 의도로 볼 여지는 존재한다. 베이커 감독은 정제된 대사 대신 욕과 속어가 난무한 현대적 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감독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부터 사실주의적 요소를 보여주며 씁쓸한 현실을 그대로 담아냈다. <아노라>에서 극적인 여성 연대의 순간이 부재한 점이나 '속 시원한' 결말이 없는 것 역시 이러한 기조의 연장선상일 수 있다.
다만, 메시지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해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극 중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 이야기를 전개하는 베이커 감독 특유의 화법은 이번에도 '부와 권력에 둘러싸여 타인의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물'과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를 이야기하는 데 그친다.
작중 아노라가 스트리퍼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노라>는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의 여성을 성 착취 산업으로 내모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등 보다 과감한 접근을 취할 수도 있었다. 션 베이커 감독은 그 대신 아노라라는 개인의 여정에 집중했고, 이는 백인 남성인 베이커 감독의 정체성을 고려하면 나름 '겸허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쉬이 말을 얹기 어려운 주제에는 정말로 말을 얹지 않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선택은 그대로 한계가 돼 돌아온다.
▲ 영화 <아노라> 포스터ⓒ 유니버설픽처스
하지만 이러한 부족함 속에서도 <아노라>만의 특장점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작중 캐릭터들이 이반을 찾으러 떠나는 과정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여는 모습은 확실히 웃음을 자아낸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찾아오는 산발적 행복. <아노라>는 그 순간을 확실히 포착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일종의 코미디 영화로 탈바꿈시킨다.
이처럼, <아노라>는 션 베이커 감독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화면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영화지만, 그 무게감에 있어서는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위축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미키 매디슨의 열연과 다채로운 장면들은 여느 블록버스터 영화 못지않은 몰입감을 보여 주니, '마음 씁쓸한 코미디'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싶은 관객들은 극장에서 <아노라>를 감상해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