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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0-09
동그란의 마음극장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2000년대 말, 어느 바닷가에서 한·일 재즈 뮤지션들이 함께하는 음악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의 스탭이었던 나는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도 화상을 입을까 걱정을 했는데 정작 행사를 시작할 때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칠 줄을 모르더군요. 인생이란, 하면서 술을 마셨던 기억만 남아 있어요.

그때 함께 일한 연출가와 통역가를 아주 오랜만에 만나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감독, 2024년)를 함께 보았어요. “요즘 장안의 화제”라면서. 극장에서 나와 짜장면을 먹으면서 영화 이야기를 했어요. 한때 음악 행사 연출가로 전국을 누볐던 그는 히라야마가 매일 선곡하는 노래들에 대해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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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팝에 무지한 저는 히라야마가 조카 아이와 “콘도와 콘도, 이마와 이마”(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하고 노래하던 장면만 맴돌았어요. 일본어 통역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녀는 ‘고모레비'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해주었죠. 한때 그녀에게 일본어를 꽤 배웠지만 다 잊어버려 주눅이 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는데 나도 모르게 엉뚱한 질문을 했던 거 같아요. “근데 히라야마가 정말 그 마담을 좋아한 거예요?”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한 남자가 자기 인생의 그림자를 갈무리하는 마음을 그린 게 아닌가 싶어져서 이 글을 시작할 용기를 내었어요. 인생에는, 도무지 지워낼 수 없는 그림자가 있는 것인가, 싶어져서요.

적절한 어른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의 열일곱개 공공화장실을 젊은 동료 타카시와 둘이서 청소합니다. 시간은 빠듯하고 동료는 게을러서 힘들 것 같은데 히라야마는 한숨 한 번 내쉬는 적이 없더군요. 매일 지각하고 청소도 대충대충 하는 타카시에게 히라야마는 불평도 잔소리도 하지 않아요. 자신이 열심히 하는 걸 내세우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지요.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 같아요. 타카시는 나이가 한참 많은 히라야마를 어려워하지 않고 친구한테 하듯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더라고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급기야 데이트 비용이 급했던 타카시는 히라야마의 차 안에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보고 당장 가져다 팔자고 해요. 나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히라야마는 그러지 않더군요. 심지어 타카시가 이끄는 대로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가게에 가서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해요. 그날 밤 히라야마가 스탠드 불빛 아래 엎드려 책을 읽던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어요. 타카시의 간절함에 공감하고 동참해준 히라야마의 하루가 동화 같았거든요. 자신의 하루 일과가 무너지고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았지만, 타카시의 데이트를 위해 희생한 히라야마의 저녁 풍경은, 그가 젊었던 어떤 날들이 드리운 그림자 같았어요.

적절한 타인

히라야마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주는 눈길이 있어요. 그런 눈길을 갖기까지 그는 어떤 시간을 지나온 걸까요? 와락 반가운 척도 아니고, 모르는 척 무시하는 것도 아닌, ‘당신 오늘도 거기 있군요, 나도 여기 있어요' 하는 것 같은 순하고 잔잔한 눈길이에요. 그런 한결같은 눈빛으로 모든 걸 바라봐요.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는 타인들을, 그날의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새롭게 마주한 존재들을, 차별 없이 바라봐요.

요요기후카마치소 공원의 화장실을 청소할 때면 히라야마는 맞은편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뭔가 특이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노인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는데요. 히라야마가 오늘의 드라이빙 뮤직을 고르듯 그 노인도 오늘의 동작을 나름 생각해서 고르는 것 같았어요. 히라야마는 노인의 공연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출근하고, 그런 히라야마가 덕분에 그 노인도 오래도록 나무 곁에 머문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샌드위치를 들고 공원으로 들어가 벤치에 앉았을 때, 옆 벤치에 젊은 여자가 혼자 샌드위치를 먹다가 그와 눈이 마주쳐요. 히라야마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지만 상대는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더군요. 내일 그녀를 또 마주친다 해도 그는 변함없이 약간의 미소와 함께하는 듯 마는 듯한 눈인사를 건넬 거예요. 답이 없다고 다음번에는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이상하죠.

과거의 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이해관계로 얽힐 일이 없는 사람들은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 눈길 한번 안 마주치고 냉정하게 지나치곤 했을지도 몰라요. 내 갈 길이 너무 중요하고 바쁘니 귀찮게 말 걸지 말라는 듯이 앞만 바라보고 걸어갔을 테죠. 그 거만하고 쓸데없이 자아가 비만했던 시절의 그림자를 다 지우려면 저 정도 다정함으로는 부족하지, 하고 내 안의 그림자가 속삭이는 걸 들었어요. 그러니까 히라야마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랬다는 말이에요.

루틴의 힘

히라야마의 일과는 순서가 분명하고 가는 곳도 정해져 있어서 똑같은 것 같지만 매번 조금씩 달라져요. 나무 옆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노숙자 노인이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하고, 느닷없이 나타난 조카 니코 때문에 화장실 벽에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감상하는 루틴을 잊어버리고 공원 벤치에 혼자 나와 샌드위치를 먹던 뚱한 표정의 그녀와도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기도 하지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단골 가게에서 지정석처럼 여겼던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자리로 밀려나 앉을 때는 제가 다 섭섭하더군요. 십수년간 연락을 끊고 지내온 여동생이 찾아와 아버지 얘기를 하던 저녁이라든가, 동네의 건물 하나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등 크다면 큰 사건도 그에게는 별일이 아니었어요. 작은 물결 하나가 조금 크게 일렁이는 정도의 무게였다고나 할까요.

그의 생활 중심에 시부야의 열일곱 개 화장실의 온전한 기능과 쾌적함을 돌보는 일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기에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지간한 일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라 여기며 가볍게 맞이하고 떠나보낼 수 있게 되는 그런 담담한 마음은, 매일의 노동이 잡아주는 무게중심 덕분일 거라고요. 히라야마는 점심때 올려다보는 하늘이 한결 더 무성해진 나뭇잎으로 풍성하게 가려진 것을 더 크고 놀라운 변화로 느끼는 것 같았어요.

한때는 히라야마도 어떤 허황된 생각에 끄달려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상처받았던 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나도 영화 속 히라야마처럼 내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과거의 내가 크게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헛된 이름들을 지우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 친구가 최근에 청소 일을 찾아 나선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인지 몰라요.

그림자 놀이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오래된 사진관과 헌책을 파는 낡은 책방과 구식 목욕탕은 히라야마가 즐겨찾는 장소죠. 그 가게들이 히라야마의 일상을 지켜주고 있어요. 히라야마의 지속적인 방문은 그 가게들이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있고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속되길 바라는 것들을 붙잡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주말에 가는 단골 술집의 마담을 그렇게 좋아한 줄은 몰랐어요. 그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서 실망하는 히라야마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어요.)

잘 조율된 일상을 반복하며, 새로운 빛들을 채집하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히라야마. 어떤 날은 완벽하고, 어떤 날은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하고, 그렇게 그는 자기 안의 어둠을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로 바꾸는 작업을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할 것 같아요. 그가 채집한 낯의 이미지는 햇살과 나무, 물결처럼 변함없는 것들이지만 그 이미지들이 매일 밤 다른 꿈을 만들어내죠. 매일이 그렇게 새로 창조하는 예술작품의 시작이라는 걸 안다는 듯 또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얼굴이 환희에 차 있어요. 어떻게 보면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이기도 하고요. 때론 꿈을 꾸는 것마저 지쳐 그만두고 싶은 날도 있겠지만 또다시 힘을 내겠죠. 자기 몫의 어둠을 다 닦아낼 때까지.

티캐스트 제공
누가 그러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대청소를 했다고. 매일 쓰는 것만 남기고 다 버린다고 벼르는 사람도 있고요.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론 빠른 시일 안에 꼭 마련해야겠다는 싶은 것들도 있더라고요. 히라야마의 집에 조카 니코가 찾아왔을 때 보니까, 히라야마도 손님이 오면 내어줄 잠자리가 있고, 둘러보고 빌려 갈 책을 골라낼 서가도 있고, 여분의 자전거도 지니고 있었어요. 그 정도는 나도 잘 준비해두고 살고 싶어요.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면 히라야마가 니코에게 그랬듯이 왜 왔냐고 묻지 않고 잠자리를 내어주고, 같이 가볼 데가 많다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나도 내 마음의 그림자를 돌보는 삶으로 건너가고 있네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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