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리뷰] <해야 할 일>동료들의 생명줄 거머쥔 노동자의 딜레마한양중공업 사무직으로 일하는 입사 4년째 '강준희' 대리는 부서를 이동해 인사팀으로 발령받는다. 회사는 경영실적 악화로 채권단의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자구책을 시행해 왔지만, 경영위기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는 인사팀에 오자마자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지시를 받는다. 사무직에서 150명을 정리하라는 구조조정 계획이다. 처음엔 질겁하지만, 준희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인 동시에, 입사 후 피부로 느껴온 회사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불가피한 일이라 받아들인다.
인사팀 내에도 구조조정 지시에 관한 생각은 다르다. 오랫동안 한솥밥 먹어온 직장 선후배들을 살생부에 올려야 함은 물론, 본인도 대상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서 인원은 고작 5명인데 팀장은 상급자 보고와 결재에 바쁘고, 차석인 부장은 거듭된 구조조정 진행에 염증이 난다며 태업과 준하는 행태로 일관한다. 결국엔 준희와 '사수'인 '동우'가 이 난제를 떠맡아야 한다. 준희는 주말도 반납하고 최대한 공정한 기준을 설정해 150명 인원 감축 공식을 도출하고 만다, 물론 마음은 무겁다.
고작 대리 직급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은 덕분에 어쩌다 보니 동료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된 준희는 성취감 대신 죄의식에 휩싸인다. 그가 고안한 기준에 삽입된 문구 하나로 오랫동안 헌신해온 직장을 떠나는 이들이 주변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사팀 내에선 갑론을박 와중에도 사명감을 가지고 회사를 살리자는 공감대가 싹튼다. 이제 150명 대상자 중 희망퇴직을 최대한 설득해내 정리해고는 최소화할 일만 남았다. 마음은 무겁지만, 결의를 다지고 이제 개별 면담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사팀의 고진감래는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임원들은 자신들의 연줄로 구조조정 열외를 자꾸 만들어낸다. 그 빈자리는 원칙과 기준대로라면 해당하지 않는 애꿎은 피해자로 채워야 한다. 준희와 동우는 공적 기준을 지켜야 한다며 항의해 보지만, '높으신 분들'의 지시는 절대적이다. 팀장 역시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한다. 준희는 존경하는 예전 부서장과 친한 선배 중 한 명을 해고 예정자로 택일해야 할 벼랑에 몰린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렇게 하면 회사가 과연 진통을 견디고 부활할 수 있을까?
정리해고법 도입 이후 변모한 노동현장의 생생한 기록 ▲ "해야 할 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재단법인 명필름문화재단
주인공과 동료들이 속한 한양중공업 인사팀은 구조조정으로 첨예한 갈등 상황에 놓인 회사 내에서 섬처럼 고립된 공간이다. 동료 직원들에겐 같은 직원이면서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얄미운 밉상이고, 임원들에겐 악역을 떠넘기는 유용한 책임 전가 대상이다. 노동법과 실행규정에 따르면, 노동자임에도 '사용자의 이익을 대리하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업장에서 고위급 관리직과 더불어 노동조합 가입제한 대상으로 규약에 명시되곤 한다. 노조를 지지하는 이들에겐 인사/노무팀은 '부역자'에 다름없다. 사용자의 시각에선 이들은 써먹다 희생양으로 버리기 딱 좋은 패에 불과하다. 영화 속 인사팀은 그와 같은 전형적인 예시 자체다.
노사분쟁을 소재로 한 국내 영화에서 <해야 할 일> 주역이라 할 인사팀은 늘 객체에 머물던 존재다. 인사담당자 개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업은 간간이 등장했지만, 인사팀 자체가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으로 승격된 경우는 낯설다. 대개 이들은 말단 악역에 머무는 데 그친다. 희생당하는 노동자나 가족을 회유 협박하고, 야비하게 조여오는 실행자로 머물러 왔다. 과연 그들의 심리와 입장은 무엇일까 궁금하던 관객에게 이 영화는 해답을 선보이는 기념비적 시도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불과 1년 전 국민 절대다수의 반발로 유예된 '정리해고법'이 슬며시 통과된다. (영화 속 시간대인 2016년 후반 기준) 채 20년도 안 된 변화였지만, 이후 한국 사회는 판이하게 변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희화화된 형태로 남발되는 'You are Fired!'까진 아닐지언정, 실질적으로 그에 비견될 정도로 해고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예전에는 당사자 과실이나 귀책 사유를 (억지로 조작해서라도) 들먹여야 했지만, 정리해고법 도입 이후엔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경영 사정'을 들먹이면 해고가 가능해진 것이다. 노동자에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질 노릇이다.
이 영화는 구제금융 사태 이후 악화한 고용환경을 여실히 관객에게 증명한다. 물론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건실한 기업과 성실한 노동자 대신에 현실과 허상을 넘나드는 투자(라 부르고 투기라 이해하는) 쏠림과 오직 단가 후려치기만 남은 현실에서 자체 기술력과 헌신적인 직원들을 자랑스러워하던 한양중공업은 설 자리가 없다. 회사가 뭘 자체적으로 해보려 해도 자금 유동성이란 서류상 지표에 막혀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다.
같은 듯 다른, 영화 속 구조조정 비교체험 ▲ "해야 할 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재단법인 명필름문화재단
리차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의 1990년 영화 <프리티우먼>에서 주요 배경이던 금융자본의 조선소 인수합병 시도는 20여 년 후 한국 남쪽 바닷가에서 재현된다. <프리티우먼>에선 임직원의 애사심과 노력에 감화된 주인공이 시세차익 대신 건실한 제조업에 마음을 바꾸지만, 할리우드 판타지는 <해야 할 일>에선 전혀 설 자리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한양중공업은 'K'-재벌 그룹 일개 계열사에 불과하다. 인사팀은 고심해 설정한 구조조정 기준을 제출하지만, 핵심 결정은 그들의 소관을 한참 벗어난다. 본부장들의 제 사람 감싸기는 공정한 원칙을 훼손하고, 구름 위 존재인 '회장님'의 '오더'가 모든 것의 상단에 위치한다. 직원들 희생이나 장기 회생방안은 '경영권 사수'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 고통 분담이 아니라 고통전담, '상후하박'의 전형적인 사례다. 누가 그런 부조리 앞에서 회사를 믿고 견디겠는가.
아마 영화를 보게 될 관객들은 몇 편의 다른 영화를 떠올릴 법하다. 로랑 캉테 감독 2000년 <인력자원부>가 첫 손에 꼽힐 만하다. 고위 관료와 엘리트 교육기관 '그랑제꼴'을 수료한 주인공이 아버지가 재직 중인 공장에 관리자로 채용된다. 현장 노동자인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아들은 '35시간 노동제'에 맞춰 경영 혁신 프로젝트를 담당하지만, 제도 도입과 인력 감원이 병행될 것임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아들이 역할을 완수해 인정받길 원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생산직 동료들을 내쫓는 실무를 맡는 게 곤혹스럽다.
<해야 할 일>과 <인력자원부>는 비슷한 상황인 주인공을 공통으로 갖는다. <인력자원부>에선 친아버지, <해야 할 일>에선 돌봐주고 추천해준 '아버지' 같은 상사라는 점이 다르지만, 인간적 감정 면에선 대동소이하다. 자식(같은 후배들)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기성세대의 단면이다. 그러나 10여 년 시차와 프랑스 VS 한국 배경 차이는 후반부 전개를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프랑스'이기에 여전히 가능한 도전과 21세기 한국에선 대다수가 포기해버린 정의의 비교가 씁쓸함을 남긴다.
아마 더 익숙한 비교는 다르덴 형제의 2015년 <내일을 위한 시간>일 테다. 자신이 부재한 사이 본인을 해고하는데 동의한 대신 상여금을 받기로 한 동료들의 마음을 돌리고자 분투하는 주인공 이야기다. 노동자와 노동자 간 갈등이란 측면에서 관련해 생각해볼 요소가 적지 않다. 특히 두 영화 속 상여금 목돈과 내 집 마련을 위한 회사 융자는 묘하게 겹쳐지는 풍경이다.
하지만 비교 대상과 달리 <해야 할 일> 속 조선소 내부는 대부분 체념과 눈치싸움에 기울어진 지 오래다. 이미 수년간 할 수 있는 구조조정 조치는 '정리해고' 외엔 다 해봤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알아서 짐 싸라는) 타 부서 대기발령과 무급 순환휴직, 희망퇴직 신청 등을 겪어 왔다. 하지만 누구도 한때 잘나가던 회사에서 망망대해로 나가고 싶진 않다. 모두가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보는 경치도 다른 법이다.
회색지대 노동자들의 배반당한 분투가 시사하는 바 ▲ "해야 할 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재단법인 명필름문화재단
실정 뻔히 아는 인사팀은 노동자이되, 경영자의 시선으로 잔정 다 털어내고 현실을 진단하고자 한다. 그 결과는 나름대로 명분과 실용을 겸비한 구조조정안 제출이다. 그들의 노력이 진심이라는 점은 준희가 작성한 구조조정 호소문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악역을 자처한 노력은 결국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주는 동료 노동자들이 아니라, 경영자의 책임감을 도외시한 상층부에 의해 배신당한다. 이러면 누가 회사를 믿고 따르겠느냐는 팀장의 꾹 참다 터지는 항변에도 임원들은 외면할 따름이다. 한국 기업문화가 여전히 전근대적 족벌 지배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통렬한 예시다.
그렇다면 인사팀의 합리적 구조조정은 회사를 구할 수 있을까? 답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회사 내 생산직 노동자들은 강성노조로 뭉쳐 생존권 사수 중이다. 궁지에 몰린 사무직들은 뒤늦게 집단행동을 준비하고 일정 성과를 단기적으로 얻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인사팀 진단대로라면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해야 할 일>은 지금껏 노동문제를 다룬 한국 영화 중 아주 특별한 변주를 선보이는 데 성공한 작업이지만, 영화가 현실을 초월할 순 없기에 후련한 해법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공장 말고 거의 유일한 다른 배경으로 거듭 등장하는 2016년 후반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시위 장면은 희망보다 현실의 냉혹함 앞에서 사분오열된 과거의 '시민' 공동체 초상으로 스산한 기억을 전할 수밖에 없다. 준희와 그의 반려가 한때 품었던 사회개혁의 꿈은 '먹고사니즘' 앞에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영화 속 그해 혹한의 겨울은 주인공들의 속내에 비하면 포근해 보일 지경이다.
<작품정보>
해야 할 일
Work to Do
2023 한국 드라마
2024.09.25. 개봉 100분 12세 관람가
감독 박홍준
주연 장성범(강준희 역), 서석규(이동우 역), 김도영(정규훈 역)
출연 김영웅, 장리우, 이노아, 강주상, 김남희
제작 명필름랩, 영화사 나른
배급 재단법인 명필름문화재단
2023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장성범),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
2023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최우수작품상, 독립스타상(김도영)
2023 부산독립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최우수연기상(김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