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23분[데일리안 = 류지윤 기자]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더운 여름날, 시각장애인 해담(최민정 분)의 고장 난 선풍기는 평온했던 일상에 변화를 몰고 온다. 선풍기를 수리하러 온 수리기사(양말복 분)는 수리를 권하기보다 새 제품을 권하고, 해담은 오래된 선풍기를 고집하며 거부한다.
수리기사는 해담의 시각장애를 뒤늦게 알게 된 후, 그의 고집이 '보이지 않아서'라고 단정하고 본인의 기준에 따른 친절을 베풀기 시작한다. 가방을 옮기고, 지갑을 찾아주는 작은 도움들은 해담의 일상적인 규칙과 안락함을 헤집어 놓는다. 하지만 해담은 이 무신경한 친절에 속으로 당황할 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작은 사건들이 겹치며 해담의 일상 속에 무신경한 타인들의 침투를 이어 보여준다. 수리기사가 떠나고 다시 돌아온 선풍기의 바람은 잠시나마 해담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이번에는 수리기사 문을 꼭 닫고 가지 않아 술에 취해 집을 잘못 찾아온 윗집 여자(안소요 분)가 등장한다. 그는 해담의 거실에 누워 잠을 자고, 깨어난 후 우연히 선풍기를 넘어뜨려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공포감이 다시 해담을 휘감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상황은 지나가고, 다음 날 윗집 여자는 새 선풍기를 가져와 사과하며 떠난다.
이어 집주인이 참외를 가져다주러 왔다가 새 선풍기를 보고는 해담 몰래 낡은 선풍기와 교체해버린다. 집주인의 무시, 윗집 여자의 무례, 수리기사의 사려 깊지 못한 배려로 해담의 마음은 잠시 어지럽다.
영화는 밝은 햇살, 불어오는 바람, 풍경의 소리를 배경으로, 잔인하고 무신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해담의 일상을 스릴러처럼 그려낸다. 모두가 떠난 후에도 선풍기는 돌아가고, 해담은 그제야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해담이 마지막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이웃들의 행동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해담의 편안한 미소는 어쩌면, 그 잔인한 세상 속에서 그나마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그러나 보는 이들은 웃을 수가 없다. 잔인한 현실 속에서, 해담이 과연 무엇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패닝'은 영화는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약자들이 겪는 무신경한 사회의 태도를 영리하게 보여줬다. 러닝타임 23분.